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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은혜나눔] 왜 하필 그 동굴에서 다윗 왕국이 시작되었을까? |
|---|---|
| 글쓴이 | 장순호 |
| 날짜 | 2026-04-27 |
| 조회수 | 3137 |
왜 하필 그 동굴에서 다윗 왕국이 시작되었을까?
"낙오자들의
공동체가 왕국이 되기까지"
20260427
역대상 11장은 놀라운 이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소브암은 창 하나로 삼백 명을 쓰러뜨렸고, 엘르아살은 블레셋 군대가
밀려올 때 홀로 보리밭을 지키다 손이 칼에 붙어버릴 때까지 싸웠습니다. 브나야는 눈 오는 날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 사자를 잡았고, 아비새는 혼자 창으로 삼백 명을 무찌르며 이름을 떨쳤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우두머리는 이러하니라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윗을 힘껏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역대상 11:10)모든 리더가 꿈꾸는 조직이 여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이력서 첫 줄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사무엘상 22:2)모든 리더가 꿈꾸는 조직의 시작은 누구도 원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배경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아둘람 굴로 피신했습니다. 기원전
11세기경, 유다 지파의 세펠라 지역에 있는 석회암 동굴이었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던 사람이, 이제 쫓기는
도망자가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사울 체제 아래서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가능성 없는 출발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동굴에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시편 57편의 표제는 다윗이 굴에 있을 때 쓴 것임을 밝힙니다. 그 자리에서 나온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편 57:1)다윗은 동굴에서 먼저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공동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이 이들에게 보여준 것은 생존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가 언제나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는 공동체가 완전히 무너질 뻔한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기습하여 성읍을 불사르고 가족 전원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남자들이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이 더 충격적입니다. "백성이 각기 자녀들로 말미암아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려 하니." (사무엘상 30:6)아둘람에서부터 생사를 함께해온 사람들이 돌을 들었습니다. 이 장면은 사울의 위기와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울도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번제를 드렸고, 응답이 없으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같은 절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사무엘상 30:6)공동체가 흔들릴 때 다윗이 먼저 한 것은 설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이 아둘람 굴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즉시 추격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브솔 시내에 이르렀을 때 600명 중 200명이 완전히 탈진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나머지 400명과 함께 아말렉을 추격했습니다. 전투는 대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 일부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벨리알의 사람들, 곧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사무엘상 30:22)싸운 자가 전리품을 가져가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 주장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공정합니다. 그런데 그 논리의 전제를 들여다보면 이것이 있습니다. '내가 싸워서
얻었다.' 승리의 주체가 나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응답은
바로 그 전제를 뒤집었습니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사무엘상 30:23)하나님이 주셨다면, 분배의 기준을 내가 정할 수 없습니다. 벨리알의 사람들이 악하다고 불린 것은 단순한 탐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그 근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선포했습니다.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이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사무엘상 30:24)그리고 성경은 이어서 기록합니다.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사무엘상 30:25)브솔 시내는 전리품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공동체가 무엇으로 살 것인가를 결정한 자리였습니다.성과가 아니라 은혜, 배제가
아니라 포함,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구적인 법이 되었습니다.
역대상 11-12장은 이 공동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시간 순서로 기록합니다. 처음은 소수였습니다. 광야 요새 시절, 갓 지파에서 다윗에게 합류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 (역대상 12:8)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랐습니다. 이어서 베냐민과 유다 자손이 광야의 요새로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어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이르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역대상 12:18)이 합류는 단순한 인간적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사람들을 다윗에게로 이끄셨습니다. 그 다음, 다윗이 블레셋 전쟁에 나갔다가 거절당하고 시글락으로 돌아가던 바로 그 귀환길에서 므낫세의 천부장들이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공동체가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를 목격했습니다. 시글락은
불타 있었고, 부하들은 다윗에게 돌을 들었으며, 추격 끝에
돌아오는 길 브솔 시내에서는 탈진한 200명을 버리지 않고 동일하게 나누는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고백이 공동체의 문화가 되는 그 장면을, 새로
합류한 자들이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헤브론 즉위식에서는 온 이스라엘 12지파가 함께 모였습니다. 유다
6,800명, 시므온 7,100명, 레위 4,600명으로 시작해 수십만 명의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둘람 굴의 400명에서 시작한 공동체가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군대가
된 것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이 성장을 다윗의 능력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사람이 더해진 그 흐름을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역대상
12:22)오늘 브솔 시내에 쓰러진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내일의 공동체를 결정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도
아둘람이 있습니다. 환난 당한 자, 지친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브솔 시내에 쓰러진 200명도 있습니다. 아파서, 연약해서, 이 계절에 함께 달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는 결국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고백이 진짜일 때, 우리는 브솔 시내의 200명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이 그 처참한 자리에서도 원칙을 세웠던 것처럼, 공동체가 가장 흔들리는 순간에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됩니다. 아둘람
굴이 왕국의 초석이 된 것은 다윗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도
누군가에게는 아둘람 굴입니다. 리더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날마다 사람을 더하십니다.
PS
매주 성경을
읽다 보면, 오래된 이야기가 신기하게도 오늘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느낍니다. 이 공간에 올리는 글들은 본문 앞에서 한 사람이 품었던 질문을 따라가며 걸어간 묵상의 방향일 뿐, 확정된 진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금 우리 시대의 언어로, 우리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로 다가가는 작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은 본문을 읽으면서도 전혀 다른 자리에서 다른
울림을 받을 수 있고,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다 보면 말씀은 더 넓고 깊어진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이 저에게는 더 깊은 이해의 시간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는
한 주간을 살아갈 따뜻한 응원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이 나눔을 통해 우리의
묵상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본문은
기업을 이끄는 사람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우리
회사의 성과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만들었습니까, 직원들이
만들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날마다 더해 주신 것입니까? 다윗의
공동체가 성장한 것이 다윗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다고 역대기가 선언하듯,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이후 모든 경영 판단의 기준을 결정합니다. 둘째, 이
성과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주셨다는 고백이 진짜라면,
그것을 나 혼자 쥐고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셋째, 우리 회사의 브솔 시내에 쓰러진 200명은 누구입니까? 이번 시즌에 성과를 내지 못한 직원, 지쳐서 뒤처진 직원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단, 다윗의 원칙은 맡겨진 역할을 다한 자에게
적용된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할 자체를 거부한 자에게 동일하게 나눈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가진 대표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공의와
은혜, 이 긴장을 피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기업을 이끄는 자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