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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난주간 은혜나눔] 특새본문 아가8:6묵상-사랑의 본질에 대한 애절한 노래
글쓴이 송현석
날짜 2025-11-27
조회수 3457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20251123 주일 설교

https://youtu.be/sKV9505L2BY


설교요약

●나는 무엇이 집중하며 살고 있나?

●피조물인 나는 과연 창조주 우리 하나님께 나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나? 무엇을 하며 살면 될지 여쭙나?

●십자가를 통과한 사랑

●거룩한 질투


아가 8장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묵상은 디모데전서 1장 4절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는 말씀을 

내게 주시는 경고로 가슴에 새기고 작성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 



1. 전도서와 아가와 시편, 다윗과 솔로몬

   전도서의 시작과 끝이 질문이라면, 아가 시편은 답이라는 이찬수 목사님 설교 말씀이 깊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 그 두 성경의 저자인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과 함께 그의 시편들이 생각속에 마구 떠오른다. 아버지와 아들이 쓴 이 세 권의 성경, 그리고 잠언까지 포함하면 네 권의 성경은 읽으면 읽을 수록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느껴진다. 오늘 아가 시편의 본문 역시 그렇게 내게는 다가온다. 솔로몬이 잠언에서 전도서에서 그리고 아가 시편에 기록한 말들과 그런 저자 솔로몬을 교육하고 키운 다윗의 시편들이 엮여 들어가, 읽으면 읽을 수록 아름다운 의미와 이미지들이 한 없이 솟아나는 광경을 네 권의 성경을 읽으며 보게 된다.


전도서 1장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장

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왜 솔로몬은 전도서의 시작과 끝을 모두 헛되다는 선포로 기록하고 있나? 이는 솔로몬의 절절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인식과 자각 때문임을 잠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잠언 16장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언 19장

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언 20장

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언 29장

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기브온에서 나타나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지혜라고 답하여 얻은 바로 그 지혜로 솔로몬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작정할 마음은 주셨지만 그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힘은 주시지 않아 장차의 일을 알 수 없고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인과 관계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임을 깨달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비록 통치 기간 중 근동 지역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지니고 여러 나라들로 부터 조공과 세입금을 받아 사십년 다스리는 동안 최소 이천톤에서 많게는 삼천톤에 이르는 금을 축적하는 강력한 권세와 부귀 영화를 누린 솔로몬이었지만, 마음에 원하고 작정하는 바를 모두 이룰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자유 의지대로 일이 되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위대한 솔로몬도 여호와 우리 하나님 앞에선 단 일 초 뒤의 일도 알 수 없는 무지한 피조물에 불과했고, 자신이 한 행위와 행동이 어떤 결과를 빚게 될지 인과 관계를 파악할 수 없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면 무엇을 하면 좋을지도 판단할 수 없는 무능한 필멸자였기 때문이다. 지혜로 깨달은 피조물의 본질과 그 본질을 살아 가며 경험한 결과가 바로 전도서의 헛되다는 구절이라 나는 묵상한다.


*솔로몬의 부귀영화에 대한 계량 시도

20251125 역대하 9장 -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

https://blog.naver.com/joeyhsong/224087306464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포해 버린 솔로몬에게 너무나 목을 매며 추구하던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사랑이었고 그예 진정으로 누군가 자신을 극진히 사랑해 주기를 원했다. 솔로몬의 아가서에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랑과 연관된 히브리 원문 어휘는 바로 다윗의 이름과 같은 자음철자를 지닌 남성 명사 STRONG 1730 '도드 דּוֹד'다. 사랑하는 것, 사랑받는 자 등으로 해석하는 이 어휘는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이 단어는 사랑 받아 생성된 결과 혹은 사랑받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도드'와 다윗과 솔로몬의 관계에 대한 이전 묵상

여호와 안 솔로몬, 솔로몬 안 다윗, 다윗 안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아가

https://blog.naver.com/joeyhsong/224061316199


 오늘 본문에 세 번 나온, 사랑을 의미하는 히브리 여성 명사 STRONG160  '아하바 אַהֲבָה'가 사랑 혹은 사랑한다는 사실과 그 존재 자체를 지칭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의미의 어휘다. 어쩌면 사랑의 행동력과 능력과 위력에 중점을 둔 어휘가 '도드'가 아닐까라는 느낌이 든다. 솔로몬은 사랑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현실화 할 수 없는 무지와 무능을 채워 주는 결정적 요소라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특히, 이미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벽하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고 본질적인 사랑 추구 이유는 바로 나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사랑에 대한 무지막지한 갈망이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보아 반드시 '예'라고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질문을 나는 하나 알고 있다. '영원히 변치않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목숨을 다해 먼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관계가 되기 원합니까?' 이는 수가성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던졌던 질문의 본질과 같다고 나는 묵상한다.


요한복음 4장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채워주면서도 마음 속에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갈망을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래서 솔로몬은 아가 시편을 통해 사랑의 그 본질을 한 꺼풀씩 벗겨가며 노래했으리라 나는 묵상한다. 사랑 역시 아무리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솔로몬같은 부귀영화의 소유자조차 피조물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없다는 진리와 같은 본질을 지녔으나, 하나는 솔로몬에게 좌절과 절망감만을 주는 반면, 또 다른 하나, 사랑은 영원히 메꿀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 속 깊은 심연을 온전히 가득 채워주는 것이라는 진리를 같이 깨달았을 것이라 나는 묵상한다. 


   둘 다 아무리 많은 재물로도 구할수 없다는 같은 속성을 지녔으나,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을 대조하는 것, 바로 솔로몬이 잠언과 전도서에서 주로 사용하던 수사법이 아닌가? 솔로몬은 이렇게 절망의 전도서와 사랑의 아가 시편을 대조하고 질문과 답의 형태로 대비했다고 나는 느꼈다.


2. 사랑은 소유관계가 될 수 있나?

   사랑하는 관계를 소유하는 관계와 동일시 하는 일은 나에게 불가능하다. 내 죄성의 본질이 자기 중심적 이기심, 그것도 매우 극단적이어서 나의 이익만을 최우선 하며 이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희생시킬 수 있는 악독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스스로 사랑하는 관계를 서로 소유하는 관계로 치환하면, 내게 남는 것은 오직 지독한 이기적 그리고 착취적 집착 뿐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가 시편은 전체를 통틀어 사랑이 서로 간의 소유 관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가 2장

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아가 6장

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아가 7장

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왜 솔로몬은 사랑이 소유관계, 서로에게 속한 관계 혹은 내가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고 반복적으로 노래하고 있나? 그것은 아가 시편에서 지금 노래하고 있는 나의 사랑의 상대가 바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찬수 목사님께서 아가 2장16절, 6장 3절, 7장 10절을 비교하며 말씀하신 20251012 설교의 총신대 김모 교수님의 설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자기 중심성을 탈피할 수 있는 사랑은 오직 나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분만 가능한 것이라 묵상한다. 이를 통해 결국 상대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임을 술람이 여인의 사랑의 태도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소유의 방향이 나의 소유에서 내 사랑하는 자의 소유로 바뀌는 사랑, 이것이 소유관계로 치환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라 아가 시편이 노래하고 있다.

 

20251012 주일 설교 당신의 사랑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https://youtu.be/9Ygc4fQr9YU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바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선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또한 온 우주를 소유하신 분이기에 가능하다고 묵상한다. 이미 모든 것을 지니셨기에 나를 소유하신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소유 총량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 중심적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이익 추구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 사랑하여 나를 소유하는 것은 결코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의 발현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사랑의 확증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진리를 다윗도 분명히 알고 있었으리라 묵상한다. 그의 시편에서 등장하는 소유에 관한 표현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관계와의 연관성이 이를 증명한다.


시편 135편

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누구도 위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나를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는 사실은 나를 정말로 순전하게 온전히 사랑하신다는 의미 밖에 생성되지 않는다. 그가 바로 온 우주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아가 시편에서 주장한 이 사랑의 본질을 하나님의 사자가 성경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있다.


말라기 3장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다윗이 깨달은 진리가 솔로몬에게 상속되어 지금의 나에게까지 아가 시편을 통해 전달된 이 진리, 온 우주를 만드시고 소유하신 창조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이기적 이익 추구도 없이 순전히 나를 소유하시는 특별한 사랑이어서 특별한 소유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도장을 마음과 팔에 새기라는 표현으로 다시 한 번 기록되고 있다.


아가 8장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마음에 새긴 소유권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나만을 위한 단 둘만의 은밀한 표식이요, 팔에 새긴 소유권은 세상과 사람에 선포하는 의미의 표식이라 묵상한다. 이는 또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침범하거나 폄훼할 수 없는 사랑의 표식이 내게 새겨지는 특별한 소유 관계이자 사랑의 관계임을 정의해 놓은 것이라 나는 묵상한다. 결코 지울 수 없는 새겨진 표식이 의미하는 것은 술람미 여인이 이미 사랑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음을 지각했기에 신랑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며, 앞으로의 삶에 있어 내가 스스로 세운 정체성을 버리고 이 특별한 소유가 생성하는 새로운 생명과 정체성으로 살아나가겠다는 의지의 선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지금까지 애지중지한 나의 정체성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나?


   소유라는 관계를 혼자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양은 없다. 정체성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양도 없다. 양인 주제에 스스로를 아무리 늑대라 하더라도 나의 주인인 선한 목자의 눈에는 난 그냥 양일 뿐이다. 나를 소유한 선한 목자,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는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규정하신 다음 나를 소유삼아 주신다. 선한 목자는 내가 잘못 만든 나의 정체성을 그의 사랑으로 제거하고 그가 만드신 진리로의 새로운 정체성을 내게 부여 하신다. 내가 내맘대로 만든 잘못된 정체성을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시는 것이다.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나의 옛 사람, 잘못된 정체성을 자신과 함께 못박아 죽으시며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이것이라고 나는 묵상한다. 그렇게 성립된, 내가 만든 정체성이 아닌 선한 목자가 만들어 주신 새생명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성립된 것이 선한 목자와 양인 나 사이의 소유 관계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내 머리와 몸을 비벼가며 나의 주인에게 나의 체취를 남기려 노력한다. 행여나 내가 그로부터 멀어지더라도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양같은 나는 내가 그에게 묻혀 놓은 나의 냄새와 나에게 묻어 있는 내 주인의 냄새를 번갈아 맡아가며 그를 찾아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술람미 여인이 신랑과 공유한 마음과 팔의 도장은 바로 그렇게 형성된 소유의 표식이며. 이미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찾아 온 성 안을 헤메이며 이 표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절박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안전하고 풍성하고 특별한 소유의 관계와 함께 자신의 창조주와의 사랑의 관계를 노래하는 피조물의 시가를 나는 어떤 고대 근동 문헌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없다고 느낀다. 이 노래는 오직 온 우주를 창조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만 생각하시고 사유하시고 만드셔서 내게 주실 수 있는 관계이기 떄문이다. 바로 그 관계를 이 표식이 창조주와 피조물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 즉, 야다의 관계, 아는 관계로 단단히 엮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라 나는 묵상한다. 이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을 같이 묵상하게 된다. 진정하고 순전한 의미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며, 서로를 온전히 완전히 안다는 것이다.


3. 사랑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본질

   사랑의 관계는 억압적이거나 강압적, 강제적이지 않다. 이는 사랑의 본질, 즉, 상대를 내 목숨을 버려서까지 배려하고 위하는 속성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상대의 자유 의지를 내 힘으로 꺾지 않는 것, 아무리 내가 전지전능하다 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의 의사와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것이 사랑의 요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의 관계란 자발적으로 그 관계 내에 머무는 것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 나는 성경을 읽으며 느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선 나를 창조하시며 나와의 인격적이고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나에게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는 자유 의지를 한 조각 내 생명과 마음에 넣어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자유 의지 생성의 닻이 될 수 있도록 에덴 동산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를 심고 이를 먹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자유 의지를 발현할 배경이 없었다면,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로봇과 자유 의지를 지닌 아담과 하와의 차이를 구분하고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뱀의 꾐에 빠져 하와는 결국 아버지께서 사랑의 관계를 위해 주신 자유 의지를 죄악을 저지르는데 써버리고 만다. 이 사건을 성경에서 읽으며 내게 든 가장 큰 의문은, 왜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선 선악과를 먹은 하와를 한 입 베어 문 즉시 죽도록 하지 않으셨을까?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아담은 죄악을 저지를 기회가 없었을텐데, 왜 아담까지 선악과를 먹게 하시고 그도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으시고 그냥 에덴에서 둘을 내쫓기만 하셨을까? 분명히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시지 않았나? 이 기록을 통해 내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선악과에 먹자마자 즉시 죽음을 부르는 독이나 다른 섭취 시 치사 작용을 일으키는 성분은 넣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선악과가 어떤 형태로든 자유 의지에 대한 확증의 수단이었지,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날 경우 이를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억지로 묶어 두는 생명 위협 수단은 아니었기 때문이라 묵상했다.


   그렇다면,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기록에서 죽음이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창세기 2장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와 생명 나무가 나의 자유 의지를 확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이를 금지하셨다는 이유만으로 내 욕망과 욕심과 욕정과 욕구를 억누르고, 예를 들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를 보고도 먹고 싶은 본능을 자신의 자유 의지로 뛰어넘어 이 말씀을 지키는 방법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어기는 방법이다. 어떤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이 창조주의 명령을 어기도록 만든단 말인가? 이는 피조물에게 창조주의 명령조차 어길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창조시 심어 주었을 때만 가능하며, 이로써 피조물은 완전한 인격적 차원에서의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상, 즉, 창조주의 명령도 어길 수 있음으로 자유의지가 있다고 확증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나와 맺고 싶어하시는 사랑의 관계를 내가 거부하고 그 관계에서 걸어 나간다 하더라도, 사랑의 본질상 아버지께선 나를 강압적으로 강제적으로 억지로 그 관계에 복속시키지 않으신다. 다만, 창조주로부터 떨어져 나간 피조물은 그 때부터 더 이상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본래의 창조 모습처럼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게 되는 것이며,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창세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단, 이 생각과 사유와 묵상은 그 어떤 신학적 주장이나 제안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며, 이단 사설의 내용을 따르거나 만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만약 향후 내가 스스로 묵상한 이 내용이 이단 사설의 내용과 비슷하기라도 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부라도 인지하거나  또는 밝혀지거나, 내가 속한 분당 우리교회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교단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요리 소요리 문답을 따르는 신앙 전통에 어긋난 점이 있거나, 마틴 루터로 시작한 개혁 교회 교리와 어긋나는 점이 있다면, 나는 즉시 이 묵상을 철회하고 사과하며 나의 이 묵상이 잘못 되었음과 전적으로 나의 범죄임을 공공연히 인정하고 회개할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나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싶어 하셔서 나를 창조 하실 때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자유 의지의 두 결과 중 하나, 즉, 순종과 불순종 중 불순종의 결과다. 그리고 이 불순종의 결과를 피조물인 나는 결코 피할 수 없기에, 이는 매우 강력한 필연의 형태를 띤 무소 불위의 힘을 발현하게 된다. 즉, 사랑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띠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사랑을 위한 필수 전제였던 자유 의지가 초래한 결과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두 최상급, 사랑과 자유 의지로 인한 불순종의 결과, 창조주의 명령을 어긴 피조물의 필연적 결론인 죽음은 그래서 비교할 수 없다. 두 종류의 최상급끼리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것이 저것과 같다는 표현 밖에 쓸 수 없기에, 아가 8장 6절에서 솔로몬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쓰지 않고 죽음처럼 강하다고 노래하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아가 8장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그리고 죽음이 사랑처럼 강한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는데, 이는 죽음을 부른 불순종에서 돌이켜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상기 시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표식으로서의 기능 때문이라 묵상했다. 죽음이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 창조주로부터 떠난 피조물의 필연적 결과라고 본다면,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선 내가 불순종했다 해서 내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은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과 함께 다른 성경에서도 당장 확인할 수 있다.


에스겔 33장

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죽음을 상기시키며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에서, 죄인인 나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돌이키고 돌이키라는 것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얼마나 많이 돌아오라 돌이키라는 말씀을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내게 하셨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반복하여 말씀하시고 계신 것을 성경 어디를 펼쳐봐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은 이렇게 나에게 돌아오라는 말씀을 계속 하시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인류 전체에게 개별적으로 새겨진 도장같은 표식인 것이다. 그렇기에 솔로몬은 죽음이 사랑만큼 강하다고 이야기한 것이라 나는 묵상한다. 죽음까지도 사실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 즉, 간절히 돌이키기를 바라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악과를 먹은 즉시 하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또한 뒷받침하는 생각이라고 나는 여긴다. 어쩌면, 죽음은 나에게 돌이키라 말씀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두 번째 기회의 또 다른 형태나 표식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죽어 버렸다면, 그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겠나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인간적 상상 한계 내에서의 인과율에 의한 나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의문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에스겔은 유독 이마의 표식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는 성경이기도 하다. 이 기록을 보면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는 자에게 표식을 하라고 나타나 있다. 이는 돌이키는 자들,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표식이기도 한 것이다. 


에스겔 9장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히브리어로 문자 타우를 가리킴)를 그리라 하시고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장로)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에스겔 9장에 대한 이전 묵상

20250729 에스겔 9장 - 구원의 표, 십자가

https://blog.naver.com/joeyhsong/223950773633


   이마의 표식이 에스겔에서 그런 의미라면, 같은 표식인 죽음에 긍정적인 의미도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성경을 읽으며 그렇다고 묵상했다. 나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죽어야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죽음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로 가는데 걸리적 거리는 것을 쓰레기장인 스올로 던져 버리는 것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와의 죄악을 그리고 아담의 죄악을 스올에 던지고 새생명을 받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중요한 단계가 바로 죽음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묵상을 마침 읽고 있던 골로새서가 뒷받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골로새서 3장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어떤 사본에, '진노가' 아래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식들에게'가 있음)


요한복음에서 '다시' 혹은 '거듭'으로 해석한 '위의 것'이 골로새서 1절과 2절에 연달아 나오고, 결국 다시 살리심을 받기 위해선 땅에 있는 나의 옛사람이 죽어야함을, 내 안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곧 우상 숭배가 죽어야함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것을 수요 예배보느라 멈추게 하시고, 예배를 준비하며 읽은 성경 통독 중 

골로새서의 이 기록을 내게 보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에 그저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올릴 수 밖에 없다.


비슷한 기록을 연달아 읽었던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죽음을 주체적으로 실행하시는 모습이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이 정도면 죽음이 반드시 부정적 의미만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고통스럽고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생명을 구하고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기 위해 하는 의료 처치가 있다. 업계에선 데브리망 debridment 이라고 부르는 죽은 조직 제거술이다. 특히 전장에서 여러가지 원인으로 생기는 열상은 손상 부위에 너덜너덜한 피부 조직들이 달려 있다. 이는 죽은 조직이지만 생살과 연결되어 있어 제거하면 상당한 고통이 수반된다. 펄쩍 뛰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극단적인 고통이 따른다. 그럼에도, 그 죽은 조직과 연결된 약간의 생살과 함께 수술칼로 이 조직들을 도려내지 않으면, 이 상처는 결국 곪아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감염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봉합해 보았자 살이 붙지도 않는다. 죽은 조직끼리는 살이 붙지 않는다. 오직 산 조직끼리만 서로 붙는 회복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통스러워도 생살을 어느 정도 도려내고 봉합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내게는 죽음이 이런 과정같아 보인다. 내가 아무리 살고 싶어도 내 죄성의 너덜너덜한 죽은 조직인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우상 숭배 탐심을 지니고서는 위의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다시 살리심을 받을 수 없다. 죽어야 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실 것 아닌가?


   하지만, 죄인인 나는 일단 죽으면 끝이다. 다실 살 수 없다. 이는 내 죄악의 댓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 대신 죽어도 스스로 부활하실 수 있는 죄없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나에게 오셔서, 그 죽음을 대신 하시고 내게 새생명을 주셨다. 이 대목이 바로 죽은 조직인 나, 옛 사람으로서의 나를 잘라내고 새로운 조직, 새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라고 나는 느꼈다. 포도나무에 접붙인 바 되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는 존재였기에, 자신의 살과 피를 내게 먹이시고 나를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이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본질이라 나는 묵상한다.


*이 묵상도 과연 신학적 정당성이 부여된 것인지 고민하던 차였는데, 

오늘 수요 예배 20251126 설교 중 김성민 목사님께서 정확히 이 부분을 설명하셨다.

정말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내 생각과 고민을 아셨던 것이리라 믿고 감사드릴 수 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죽음의 또 다른 의미를 드러내는 생각이 하나 더 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내게 닥친 불순종의 결과, 죽음을 당장 없애실 수 있는 분이시다. 나를 그렇게나 사랑하신다면 왜 하와의 선악과 사건 그 자리에서 당장 나에게 들이닥친 죽음을 없애지 않으셨을까? 만약 자신의 설정한 법칙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전지전능하심과 모순되는 점이라 볼 수 있지 않겠나? 분명히 하실 수 있음에도 하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죽음이 바로 사랑이 본질이신 하나님의 또 다른 본질, 공의를 드러내시는 것이라 묵상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의롭고 선한 분이시다. 그렇기에, 창조주의 명령을 어긴 피조물에게 들이 닥친 죽음을 댓가 없이 사라지게 하시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죄인을 벌하실 공의와 정의와 선하심의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물론, 전지전능하심이란 모순을 뛰어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기에 다른 어떤 우회적 방법이 분명히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는 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인 나의 생각과 사유와 상상을 아득히 뛰어 넘어 도저히 이해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내게 행하시는 모든 섭리를 내 생각의 범위 내에서 이루시려는 사랑과 배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기에, 나에 대한 공의와 정의를 확증하시는 방법으로 죽음을 의로우심과 선함의 결과로 삼으신 것이기도 하다 나는 묵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게 빛의 자녀라 말씀하시며 빛의 열매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기록하셨기 때문이다. 빛의 자녀인 내게 빛은 아버지이시니 같은 속성인 선함과 의로움을 지니고 계시지 않을까?


에베소서 5장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솔로몬이 아가 8장 6절에서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는 기록에서 또 주목해야할 점은, 과연 누구의 죽음이냐는 것이다. 혹은 무엇의 죽음이냐는 것이다. 사랑은 신랑의 사랑, 즉, 나를 먼저 사랑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사랑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언어학적 측면에서 히브리  원문 기록에서 죽음에 해당하는 어휘에 관사가 붙어 있을지가 굉장히 궁금했다. 딱 지정된 어떤 특별한 누군가의 죽음으로 기록되었는지, 아니면 수 많은 죽음들 중의 하나인지, 아니면 복수의 죽음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찾아보니 전치사 역할을 하는 접두사가 붙은 남성 단수 명사의 형태로 기록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불특정한 하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가 8장 6절 히브리원문.png


빨간 네모로 표시한 어휘 '캄마웻 כַמָּ֙וֶת֙' 은 죽음을 의미하는히브리 남성 명사 STRONG 4194 '마윃 מָוֶת' 앞에 우리말의 조사, 영어의 전치사 역할을 하는 접두사 '카 כַ'가 붙은 형태다. 이 접두사의 의미는 '처럼'.


   본문의 '죽음'에 정관사 '하 הַ'가 붙어 특정한 어떤 단 하나의 죽음이라면 과연 사랑과 같이 강하다고 솔로몬이 자신있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라 나는 예상했다. 성경에 사랑과 같은 정도로 강력한 단 하나의 죽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본문에는 정관사 '하 הַ'는 없이 '처럼'을 의미하는 '카 כַ' 만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복수 명사가 아니라 단수 명사라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묵상의 영역이 계속 펼쳐질 수 있었다. 성경에서, 특히 오늘 읽은 히브리서에서 '단번의 희생'이 연달아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정말 신기한 우연같은 필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브리서 7장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브리서 9장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오늘 본문의 죽음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과연 솔로몬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기록할 만한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큼 강하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의 전제 조건이자 단번에 희생하신 죄없는 분의 죽음은 세상 끝날에 결국 죽음조차 사망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죽음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을 수식하는 '죽음 같이 강하고'의 죽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이루실 수 있는 죽음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요한계시록 20장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오늘 아가 시편 한 구절을 쓴 솔로몬에게 직접 묻지 않는 이상, 그리고 이를 솔로몬에게 쓰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직접 얼굴을 맞대고 묻지 않는 이상 정확한 의미를 해석할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와 '사랑은 죽음같이'를 묵상하며 내 마음에 들어온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예상 외의 것들이 많았고 그러기에 내게는 더욱 더 큰 은혜였다. 이 글은 단지 묵상에 불과한 것이기에 신학적 제안이나 주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상상의 나래를 훨씬 더 크게 펼칠 수 있었고, 그것이 내게는 훨씬 더 큰 은혜로 다가 왔다고 느꼈다.


4. 사랑과 질투

   사랑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같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사랑의 경험이 있다면. 그러나 왜 사랑과 질투가 그렇게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가에 대해선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둘 다 감정이고 감정에는 이유나 근거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부분이 개입된다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아가 본문의 질투, 그것도 거룩한 질투에는 분명한 사랑의 본질이 개입된 결과라고 본다. 거룩이란 수식어를 붙이면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거룩이란 결국 구별하고 구분한다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아가 시편은 사랑의 시편이라는 특성상 사랑의 본질에 대한 표현들이 여기 저기 도사리고 있다. 사랑이 질투의 원인이 되는 구체적 이유 역시 아가 시편의 가장 주요한 구절들에 도사리고 있다.


아가 2장

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아가 6장

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아가 7장

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 가장 중요한 본질은 바로 배타성이다. 이 배타성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자, 창조주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사랑과 똑같은 관계가 바로 소유의 관계, 소속감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관계이다. 내가 살아가며 가장 강렬하게 갈망하는 두 감정, 사랑과 소속감은 사실 사랑으로부터 기원한 같은 감정의 다른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배타성에 대한 이전 묵상

250927 특새 6일차 설교묵상 - 배타성에 관하여

https://blog.naver.com/joeyhsong/224023855218


20250718 아가 6장 - 사랑의 본질이 정체성을 결정한다

https://blog.naver.com/joeyhsong/223937940923


   소유와 소속은 한꺼번에 둘을 대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한 개체의 부분만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는다. 기본적으로 항상 개별적 개인에게 전체로서만 허용되는 배타적 관계 맺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랑 역시 한꺼번에 두 대상을 상대로 삼을 수 없으며, 이 본질을 침범하는 순간 불타오르는 사랑은 더욱 맹렬히 불타오르는 질투를 생성해 내게 된다. 질투가 정말로 고통스러운 이유는 이 감정이 불타오를수록 그 근원인 사랑도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면서 분노하지만, 결코 증오할 수 없는 이런 고통스런 상태는 사랑의 배타성이 침해될 때 나타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질투의 본질이라 느낀다.


   이 배타성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시고 사랑의 본질 중 하나로 못박으셨다.


마태복음 6장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렇기에 질투는 사랑과 많은 속성을 공유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불과 같은 속성이다.


아가 8장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사랑을 곧잘 불에 비유하듯 솔로몬도 질투를 불로 노래하고 있다. 이는 희생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고 있는 사랑과 똑같이 질투도 희생을 본질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상대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음에도 그를 떠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희생의 한 장면이 아닐까? 이는 배신한 이스라엘 민족을 놓고 애면글면하시며 결코 떠나지 않으시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기도 하다. 처참한 배신에 떠는 고통스런 질투의 순간에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말 초월 번역으로 기록한 성경 한 구절을 나는 안다.


예레미야 31장

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성경 구절은 창자가 들끓어 오르도록 반드시 불쌍히 여기시리라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우상 숭배로 참혹하게 아버지를 배신한 이스라엘에게 향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히브리 원문에는 창자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매우 강하게 갈망하거나 얻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을 슬프고 애틋하게 그리워 하는 형상을 의미하는 동사 STRONG 1993 '하마 הָמָה'를 쓰고 있을 뿐이다. 그 희생 강도가 크면 클 수록 감정은 더욱 불타 올라 결국 여호와의 불의 기세와 같아진다 노래하는 솔로몬이 이 예레미야 31장 20절의 우리말 성경을 읽었다면 그가 분명히 손뼉을 쉴새없이 치며 아가 8장 6절에서 내가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라 동의 했으리라 나는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사랑과 질투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기에, 질투에는 사랑에는 없는 매우 결정적인 요소가 한 가지 있다. 바로 극단적인 복귀 요구, 즉, 돌이키고 돌아오라는 간절하고 절박하고 필사적인 요구가 사랑 위에 얹힌 것이 바로 질투다. 그렇기에 질투는 더 이상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사랑의 모습을 버리고 잔인한 모습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상대에게 돌아오기를 강권하는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며, 솔로몬은 바로 이 지점을 아가 시편의 한 구절로 승화 시킨 것이라 묵상한다. 그 잔인함은 모든 것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거기에 들어가면 무엇이든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스올의 그것이라 단정하는 것은,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영생을 잃고 영원한 불못, 두 번째 사망에 돌입하게 되는 급박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잔인한 것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그의 사랑이 아니라, 거기 들어가면 무엇이든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스올의 잔인함이며 나는 거기로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혼신의 힘을 다하여 부르짖고 있음을 생생하게 솔로몬의 기록하고 있다고 묵상한다.


   사랑은 나에게서 돌아선 사람을 돌이킬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질투는 할 수 있다. 간절한 질투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목숨을 던지며 돌이키고 돌아오라는 절규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생명으로 돌아서게 만든 사건이 나는 십자가 사건이라 묵상한다. 이는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제발 우상으로 삼은 율법주의에서 돌이키고 돌아서서 나의 사랑으로 돌아오라 간절하게 외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마태복음 9장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호세아 6장 6절)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복음을 따르며 함께 식사한 세리와 죄인들은 이미 구원받을 기회를 부여받고 구원받았음에도 자기의 교만과 율법주의에 빠져 구세주를 거부하고 부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그들이 숭배하는 구약성경 말씀을 들어 간절히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같은 구절을 인용하시며 같은 대상에게 같은 간절한 요청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12장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7   (호세아 6장 6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몇 천년을 기다려 온 구세주 메시야 앞에서 면전에 대놓고 그를 부인하고 배신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 처참하게 배신한 너희들의 자비를, 원문 어휘로는 헤세드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바로 사랑에 더해 돌아오라 간절히 요청하는 거룩한 질투의 모습이라 나는 묵상한다. 그리고 그 거룩한 질투의 근원이 바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그 질투 역시 여호와의 불의 기세와 같은 것으로 솔로몬이 기록했다 묵상한다.


5. 아가 8장 6절 묵상을 쉬며

   아가 8장 6절과 7절에 대한 묵상을 나는 평생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그래서 이 글의 마무리의 제목을 묵상을 쉰다 기록했다. 오래 전부터 이 구절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나도 다른 피조물들처럼 오직 나만을 사랑하고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너무나도 강렬하게 갈망하며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온 몸의 모든 세포가 아프도록 나는 결코 멈추지 않고 쉴새없이 갈망하고 갈구한 사람임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세상과 사람에게서는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없음을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 안에도 그런 사랑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남에게 요구한다면 그것만큼 뻔뻔하고 창피를 모르는 일이 어디 있겠나? 이런 지경에 있는 나이기에 오늘 아가 본문을 더욱 더 집중하고 또한 깊이 사유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며 묵상할 수 밖에 없었고,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글이 흘러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순간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나는 수많은 성경 구절들과 생각들에 놀라워 하며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그리고 그 사랑에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아가 시편은 분명히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시는 간절하고 절박한 편지라고 확실하게 느낀다. 그리고 그 진리를 묵상하며 깨달아 알고 맛보아 알 수 있었다. 나에게 돌이키고 돌아오라는 간절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사랑의 본질을 맛보아 알게 하신 이유는 곧 내게도 그런 사랑을 할 기회를 주실 것이라는 의미로 나는 받아들이고 그런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내게도 이루어 지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늘 그렇듯, 예배와 말씀 묵상과 기도와 찬양과 감사가 내 삶의 최우선이 되어야하며, 나는 이를 절대로 멈추지 않아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아가 8장 6절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으며 묵상하고 받은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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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6 [고난주간 은혜나눔] ‘만도서’가 삶에 구호가 되기를.. 임주희 2025.09.273944
2575 [고난주간 은혜나눔] 25년 특별새벽기도회 마지막날    토요일 특새는  밤12시 하면 어떨까요??? 박정호 2025.09.273845
2574 [고난주간 은혜나눔] 송청 중1 박시홍샘 감사합니다! [6] 우아미 2025.09.274709
2573 [고난주간 은혜나눔] 특새다섯째날 : 사26:9 / 시42:1-2 김동욱 2025.09.273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