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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을특새 은혜나눔] 두려움에 관한 묵상 - 2일차 요나 1: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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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현석 |
날짜 | 2024-10-01 |
조회수 | 308 |
2024년 10월 1일 가을특별새벽부흥회 2일차
「천국의 사냥개이신 주님 때문에」
설교: 이찬수 목사님
본문 :요나 1장 11- 17절
두려움에 맞닥뜨린 인간 군상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선원들은 압도적 두려움을 느끼고 각자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한다. 결국 하나님께 무죄한 피를 자신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그리고 바다가 즉시 잔잔해지자, 이제 선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기 시작하고, 그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한다. 흉용한 바다를 보고 두려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잔잔한 바다를 보고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 않는다. 선원들은 바다의 흉용함을 뛰어넘는 존재를 바다를 통해 깨닫고 체험하고 경험하게 되고 결국 두려워하게 되었다. 즉, 정작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할 것은 바다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셨고, 바다는 인생이 정말로 두려워해야할 것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깨닫는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선 불순종하는 요나에게 침체를 불러오시기 위해 폭풍과 수치를 던지고 계신다. 하지만, 아직도 요나는 자기 주장을 꺾지 않고, 배를 니느웨로 돌리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 소견대로 선원들에게 비장하게 외친다. '나를 바다에 던져라. 내가 바로 이 폭풍의 원인이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인간들이 쳐다 보아야할 두려움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빼앗아 자신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돌리는 비장하게 정직한 요나가 얄미웠을 것 같다. 결국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몰살당할 위기에서도 자기 주장을 꺾지 않은 요나와 그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선 죽음이 아니라 마땅한 두려움을 받기를 원하셨고, 요나는 오늘도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성경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은 비장한 정직의 본질이다. 요나의 비장함은 진짜 용기가 아니라 포장된 비겁함이다. 진짜 용기는 자기 주장을 거두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배를 니느웨로 돌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나? 자기 소견을 꺾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내 죄성의 본모습이다. 차라리 죽을 지언정 하나님 말씀을 못 듣겠다. 왜? 내 주장이 맞고, 옳고, 바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너무나 확실히 알고 있던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에 회개를 촉구하기만 하면 그 백성들이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리란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꼴을 볼 용기가 없었던 요나는 비겁하게 배를 타고 도망치며 외치고 있다. '니느웨가 구원받는 꼴을 볼 수 없으니, 나는 차라리 죽으련다!'
하나님께선 왜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원하시나? 두려움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랑과 인자와 인애와 자비와 헤세드의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기를 원하시는가? 두려움은 의외로 사랑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두려움은 사랑과 동일하게 강력한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만약 두 사람을 동시에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것이 사랑이 아니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와 상대들을 속이는 거짓말이라고 말해 줄 수 있다. 교묘한 교만과 자기애로부터의 거짓말은 언제나 인간을 깊은 거짓에 빠뜨려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을 두려워한다면, 바로 옆에 그보다 조금 덜 두려운 대상이 자리잡고 있다 할 지라도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두려움이 불러오는 고통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손목이 잘라진 사람은 다른 남은 손의 손톱이 빠져도 그 고통은 느낄 수 없다. 가장 큰 두려움만이 나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된다. 다른 어떤 대상도 사랑하기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질투의 하나님께선 나의 사랑도 나의 두려움도 독점하기 원하신다. 오직 그만 사랑하고 오직 그만 두려워하기를 원하신다. 사랑과 두려움의 배타성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적용되기 원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선 천대만대에 끊이지 않는 사랑과 인애와 헤세드를 베푸시고, 급기야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끝없이 하나님과 동거하게 만드신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인가? 나는 하나님만이 나를 다스리시기를 원하나? 그렇다면 당연히 나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이 옳고 바른 길이다.
한편으로, 내 입장에서 두려움을 생각해 본다. 세상의 것들과 전지전능한 하나님 둘 중 막상 두려움을 느껴야할 대상은 무엇인가? 필멸자인 인간과 영원하신 하나님, 태초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 중 마땅히 내가 두려워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논리와 합리를 동원하지 않아도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막상 하나님 이외의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눈이 보이는 것의 압도적 효과가 너무 커서? 아니면 나의 유익이 침해당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하나님 이외의 것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내 삶의 우선순위가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다. 손톱이 뽑히는 것도 매우 아프지만, 손목이 잘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누가 손톱이 뽑힐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기 손목이 잘리도록 방치할까?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전지전능함에 대한 생각이 너무 허술하거나 개념 혹은 상상의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은 현실이고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것이다. 언제나 내 곁에 계신 하나님과 그의 전지전능함은 실존과 실재 그 자체다. 그렇기에 그 막강하고 압도적인 권능은 두려움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총 한 방으로 쓰러질 곰을 만나도, 혹은 동물원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만나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존재가 인간일진대, 무소불위한 전지전능함의 실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이런 모순을 일으키는 원인이 바로 나의 죄성이다. 나의 주장을 거두지 않는 죄성의 본질은 내 안에 전지전능함에 대한 두려움을 거세한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짓게한 원수 마귀의 가장 크고도 교묘한 함정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되찾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되찾기 위한 첫 발은 티끝와 재를 뿌리는 애통한 회개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가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달려와 목을 안고 입맞춰 주시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또한 사랑하는 것이 나의 창조목적임을 잊지 않고 오늘 하루를 살아내려 발버둥친다.
설교요지
1.천국의 사냥개 되신 하나님의 추적을 피하지 말고 용납하는 아버지께 돌이키라
2.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개입을 연습하라
3.하나님께 굴복하고 단순하게 살라 = 비장하지 말고 자기 주장을 거두고 그냥 돌이키라
4.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떨고 생명을 걸고 인생을 걸고 순종하며 주 따라가는 자가 되자
5.두려움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이 부흥이다 - 티끌과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라